
영아들이 자동차가 되어 세차장을 직접 통과한다면 어떨까요? 처음엔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교통기관 놀이에 주유소와 세차장을 더했을 뿐인데, 교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말에 부모님과 드라이브하며 쌓은 영아들의 생생한 경험이 놀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순간 저는 "이게 바로 영아 주도 놀이구나" 싶었습니다.
주유소 놀이, 영아의 경험이 놀이를 바꾼다
영아들이 주유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건 사실 저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교통기관을 주제로 놀이를 이어가던 중, 아이들 입에서 "아빠랑 차에 기름 넣었어요", "세차했어요"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이처럼 영아기의 놀이는 생활 경험과 직결됩니다. 제가 직접 관찰해 보니, 아이들이 먼저 주제를 꺼낼 때 놀이의 몰입도와 지속성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초기에는 놀잇감을 활용한 상징놀이(symbolic play)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상징놀이란, 사물이나 상황을 실제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여 표현하는 놀이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장난감 자동차에 "기름 넣는 척"을 하거나, 호스 모양 블록을 들고 주유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부모님이 주유소에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며 기억을 언어와 동작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무했던 어린이집은 직장 어린이집이라 맞벌이 가정이 대부분입니다. 가정에서 직접 상자로 자동차를 만들어 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고, 원장 선생님께 자동차 모형 종이를 구매해주실 것을 요청드렸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는데, 아이들이 채색도구와 꾸미기 재료로 자신만의 자동차를 꾸미는 과정에서 자발성과 표현 욕구가 폭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단순한 만들기 활동이 아니라, 자신이 탈 "나만의 차"를 만든다는 감각이 놀이 전체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어준 것으로 보였습니다.
영아기 놀이에서 이러한 경험 기반의 역할놀이(role play)는 발달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역할놀이란 특정 인물이나 직업의 역할을 맡아 그 입장을 간접 체험하는 놀이로, 사회적 이해와 공감 능력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출처: 누리과정 포털(교육부·보건복지부)에서도 영아기 놀이 지원의 핵심으로 "영아의 일상 경험을 놀이와 연결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상징놀이 단계: 장난감으로 주유·세차 상황극 표현
- 자동차 만들기: 자동차 모형 종이에 채색·꾸미기로 자발성 자극
- 역할놀이 확장: 부모 역할, 주유원 역할 등 다양한 입장 체험
세차장 신체놀이, 공간 하나가 만들어낸 변화
영아들이 직접 자동차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저는 공간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체 움직임이 활발한 만 2세 전후 영아들에게 앉아서 하는 놀이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유희실과 교실에 주유소와 세차장 공간을 직접 꾸렸습니다. 가장 공을 들인 건 역시 세차장이었습니다.
교실 입구에 색깔 비닐을 길게 잘라 이어 붙인 다음, 아이들이 직접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공간을 완성했을 때 솔직히 "과연 좋아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반응이 남달랐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이 줄을 서서 통과하고, 통과하자마자 다시 줄 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단순한 장치 하나가 신체놀이(physical play)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체놀이란 대근육을 활용하여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말하며, 영아기의 건강한 운동 발달과 공간 지각력 형성에 직접적으로 기여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의인화(personification) 놀이였습니다. 의인화 놀이란 사람이 사물이나 동물의 특성을 직접 몸으로 표현하는 놀이 방식으로, 인지 발달과 창의적 표현력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아이들이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팔을 앞으로 뻗고 세차장을 통과하는 모습은, 그냥 봐도 의미가 다른 놀이 장면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빠 흉내를 내며 운전하고, 또 어떤 아이는 세차 직원이 되어 "손님, 세차 끝났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영아기에 다양한 사람의 입장과 직업적 특성을 놀이로 경험하는 것은 사회인지(social cognition) 발달의 초석이 됩니다. 사회인지란 타인의 감정, 의도, 역할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능력을 뜻하며, 이 능력은 이후 또래 관계와 협력 능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출처: 보건복지부 영유아보육법 관련 발달 지침에서도 영아기의 놀이 경험이 사회정서 발달의 핵심 기반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점이 교통기관 확장 놀이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달적 성과였습니다.
- 세차장 비닐 통과 공간: 대근육 발달을 자극하는 신체놀이 거점 역할
- 의인화 놀이: "부릉부릉" 소리와 몸짓으로 자동차를 직접 표현하며 인지·표현력 발달
- 직업 역할 체험: 주유원, 세차 직원, 운전자 등 다양한 역할을 통해 사회인지 형성
이번 놀이를 돌아보면, 거창한 준비보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빠랑 기름 넣었어요"라는 짧은 문장이 없었다면, 세차장 비닐 통로도, 자동차 만들기도 없었을 테니까요. 영아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놀이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꺼낸 경험을 놀이로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계시다면, 아이가 최근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 이야기 안에 다음 놀이의 씨앗이 이미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