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실에서 휴지가 선풍기 바람에 훌쩍 날아간 그 순간, 솔직히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아이가 흘린 음식물을 닦으려다 생긴 우연이었는데, 그게 한 달 넘게 이어진 놀이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만 1세 영아들과 일반 티슈 한 장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놀이가 가능하다는 걸, 직접 해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바람 한 줄기가 만든 놀이의 시작
영아 교육에서는 흔히 "교사가 활동을 준비해야 놀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처음엔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휴지놀이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계획된 활동이 아니라 일상의 우연에서 놀이가 출발했고, 오히려 그래서 아이들의 반응이 훨씬 진했습니다.
만 1세 영아들은 언어적 상호작용보다 비언어적 상호작용, 즉 표정이나 몸짓, 직접적인 신체 움직임으로 자신의 흥미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비언어적 상호작용이란 말 대신 눈빛, 손짓, 몸의 방향으로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휴지를 잡으려고 몸을 뻗고, 뛰어가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그 자체로 "이게 재미있어요"라는 신호였습니다.
한 명이 시작하자 곁에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따라붙었고, 자연스럽게 평행놀이가 이루어졌습니다. 평행놀이란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도 서로 직접 상호작용하지 않는 놀이 형태로, 만 1세 영아 발달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놀이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건 교사가 놀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놀이의 흐름을 지켜보며 적절한 시점에 환경을 조성해 주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각티슈를 사용했는데, 제가 직접 써봤을 때 각티슈는 아이들이 한 장씩 뽑아 쓰는 구조라 양이 금방 소진되고 놀이가 끊기더라고요. 그래서 두루마리 휴지로 바꿨습니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원형 두루마리 휴지를 지원받았더니 수량이 확보되면서 놀이의 지속 시간과 공간 활용 폭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물과 사인펜이 더해진 감각탐색
바람놀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아이들은 그 다음을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아 감각 활동은 촉각 위주로 설계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매체의 성질 변화를 관찰하는 과정 자체가 훨씬 강한 탐색 동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물을 먼저 추가했습니다. 가정용 용기에 물을 담아 제공했는데, 아이들이 젖은 휴지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마른 휴지와 젖은 휴지를 번갈아 잡으면서 그 차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이게 영아 과학 교육에서 말하는 감각운동 탐색입니다. 감각운동 탐색이란 눈과 손, 몸 전체를 동원해 물체의 특성을 직접 경험으로 파악하는 인지 발달 방식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사인펜을 지원했습니다. 아이들은 휴지에 색을 칠했고, 거기에 물을 더하자 색이 번지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이 번짐 현상은 크로마토그래피 원리와 연결됩니다. 크로마토그래피란 물질이 용매를 따라 이동하며 분리되는 현상으로, 이 경우 사인펜 잉크의 색소 성분이 물을 흡수한 휴지 조직을 따라 퍼지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이 단어를 쓸 필요는 없지만, 교사가 이 원리를 알고 관찰하면 놀이의 의미를 더 깊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휴지놀이에서 확장 가능한 감각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마른 휴지 바람놀이: 신체 움직임 자극, 대근육 발달
- 젖은 휴지 탐색: 촉감 변화 인식, 건조와 수분의 차이 체험
- 사인펜 + 물 번짐 활동: 색 혼합, 시각적 변화 관찰
- 말린 휴지 공간 구성: 창의적 공간 인식, 소근육 조작
0~2세 영아의 경우 감각 탐색 활동은 인지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아기의 감각 경험이 이후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의 기초가 된다는 점은 피아제의 감각운동기 이론에서도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아동학회).
놀이 주도권과 환경 교육, 두 가지를 함께
일반적으로 영아 교실에서 교사가 놀이를 주도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운영해 보니 교사가 뒤로 빠지고 아이들에게 놀이의 주도권을 넘겼을 때 오히려 더 안전하고 더 깊은 탐색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놀이 주도권이란 교사가 방향을 지시하지 않고 영아 스스로 탐색 대상과 방법을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교육적 접근을 말합니다. 2019 개정 누리과정과 표준보육과정에서도 이 개념은 핵심 원칙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놀이 주도권을 교사가 아닌 아이에게 넘기는 것이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설계된 자율성 보장이라는 의미입니다(출처: 보건복지부 보육정책관).
한 가지 예상 밖의 고민도 있었습니다. 평소 환경 교육 시간에 휴지를 아껴써야 한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놀이 지원 차원에서 대량의 휴지를 사용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이걸 모순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교육의 연장선으로 연결했습니다. 놀이가 끝난 후 젖은 휴지를 모아 말리는 과정, 한 번 쓴 휴지를 재활용해 다른 방식으로 또 놀이하는 경험 자체가 환경 감수성을 키우는 실천적 교육이 될 수 있었습니다.
표준보육과정에서는 영아기의 탐색 경험을 "놀이 그 자체가 배움"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휴지 한 롤이 신체 활동, 감각 탐색, 미술 경험, 환경 인식까지 연결된다는 걸 이번에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휴지 한 장이 이만큼의 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서, 일상 교재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반응이 모든 걸 증명해 줬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거창한 교구보다 교실 안 가장 흔한 물건부터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시길 권합니다. 의외로 거기서 놀이가 시작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8ApJDuivZA&list=PLN_arLVZmXjbjuvgRLCXiU-0y82wtiTJZ